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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허무를 넘어

1.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인생의 목적. 전도서에서 찾는 의미

우리는 모두 행복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단순한 기분이나 환경의 변화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더 근원적이고, 더 크며, 더 지속적인 만족을 향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성취한 후에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그 감정 말입니다.

존 파이퍼는 그의 책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누릴 때,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게 영화롭게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단지 한 신학자의 개인적인 생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 모양의 공허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모양의 공허’는 단순한 감정의 공백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필요로 하는 구조적 결핍을 의미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갈망이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 관계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통찰은 C.S. 루이스의 글에서도 확장됩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있다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내가 이 세상을 위해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의 욕망이 이 세상의 경험으로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그 욕망 자체가 초월을 향해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 땅의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으며, 그 갈망은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향한 내적 나침반과 같습니다.

이들의 말은 전도서 저자의 깊은 고백과 깊이 공명합니다(전도서 1:8).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누려도 인간의 갈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이 허무의 깊이를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며, 바로 그 허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고, 그분 안에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세상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은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 존재의 목적입니다.

전도서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의 깊은 갈망을 온전히 채울 수 없음을 말하며, 그 갈망이 우리를 결국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 갈망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방향감입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전도서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선물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는 것.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개념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

맛있는 음식, 멋진 여행, 성공과 같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린다 해도, 그 만족은 결국 잠시 뿐입니다. 이러한 좌절감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들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도서의 설교자는, 덧없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단, 그 기쁨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전도서 2:24).

이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기쁨을 장차 있을 ‘미래의 보상’이나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수 주신 것임을 인식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기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전도서만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기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신명기 12:7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의 식사와 축제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경외와 기쁨이 함께하는 예배 행위였음을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4:4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며, 고난 중에도 가능한 기쁨의 원천이 외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알려줍니다.

시편 16:11은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라며, 하나님 임재 안에서의 기쁨은 조건과 무관하게 넘치는 충만함으로 묘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을 소비재처럼 여기고, 성취하는 일이 진정한 기쁨이라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 전도서의 저자도 이미 고백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8)

흥미롭게도 현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만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욕망을 좇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그 만족은 일시적이며, 곧 새로운 욕구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심리는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은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 또는 ‘기준선 적응(baseline adaptation)’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또한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목표 이동(goal shifting)’ 현상은, 인간의 갈망이 단순한 충족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방향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기쁨을 끊임없이 ‘더 많은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전도서 2:10–11은 이런 내면의 허무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생각해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며 공허함을 느끼는 삶 대신, 전도서는 더 나은 관점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입니다.

기쁨은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인 임재 가운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진리를 체험으로 고백했습니다. 고아 1만 명을 돌본 믿음의 사람 조지 뮬러(George Müller)는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꼽았습니다. 그는 기쁨이 사명과 헌신의 에너지원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칼뱅(John Calvin) 역시 기쁨을 “경건의 본질”이라 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의 자연스러운 열매라고 설명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먹고 마시며 수고하고 웃는 이 모든 일상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쁨의 장소라고.

“내가 기뻐하는 것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이라. 이는 해 아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몫이기 때문이라.” (전도서 8:15)

전도서가 말하는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깊은 만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만족은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의 평안과 충분함이며, 외적인 상황과 관계없이 누릴 수 있는 영적 안정감입니다.

전도서 5: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수입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외적인 성취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전도서 6:3은 수많은 자녀와 장수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영혼이 만족을 누리는 것”임을 말합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기쁨은 단독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이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 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단지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공급하신다는 존재적 안정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만족의 결합된 체험이야말로, 전도서가 말하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삶이 덧없기에, 우리는 오히려 순간을 더 귀히 여길 수 있습니다. 삶이 유한하기에, 지금이라는 시간을 더 의식하며 살 수 있습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전도서 9:10)

이것은 무의미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전도서는 결국 우리를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주신 오늘의 삶을 기쁨으로 누리고, 만족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누릴 때, 우리는 허무를 넘어서는 지혜로운 삶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기

전도서의 설교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나 형식적인 태도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경외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과 깊은 존경이 어우러진 감정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경이감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0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로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경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경건한 태도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초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때때로 ‘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질문하게 되지만, 전도서의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뿌린 씨앗은 내일 열매를 맺지 않지만, 그 과정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전도서 8장 17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깨닫지 못하나니, 지혜로운 자라도 비록 알겠다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라.”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지(無知)는 불안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퍼즐처럼 조각난 채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전체 그림을 알고 계신 디자이너이십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야 안에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의 실제적 모습입니다.

전도서 7장 14절은 삶의 모든 계절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리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엔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곤고한 날에도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하라”는 단순히 반성하거나 인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곤고한 날은 우리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직면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기야말로 우리가 자신이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기회입니다.

욥은 고난의 날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경외는 바로 이런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곤고한 날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신뢰는 단단한 믿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전도서 12장 13절은 인생의 결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본분’은 단지 종교적 의무나 율법적 책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창조된 목적이자 존재의 이유이며, 진정한 정체성의 회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가정에서 사랑으로 섬기며,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용서와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의 실제 모습입니다.

전도서의 결론은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는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모든 계절을 선하게 이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거은 불확실성을 평안으로 바꾸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통제하려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분을 경외하는 삶은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자리에, 진정한 쉼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지혜는 분명합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주권을 경외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기쁨과 의미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영원한 설계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설계는 인간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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