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방법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을 꿈꿉니다. 어떤 이는 안정된 삶을, 또 어떤 이는 열정적인 성취를 원하죠. 관계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거나, 조용한 평화 속에서 만족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해 보이는 삶의 방향은 놀랍게도 몇 가지 핵심 흐름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행복을 탐구하는 심리학자, 자기계발 작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들의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살펴봅시다.
먼저 심리학 분야에서는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그의 저서 『진정한 행복(Authentic Happiness)』에서 제시된 PERMA 모델은 행복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합니다. Positive Emotion (긍정 정서), Engagement (몰입), Relationships (관계), Meaning (의미), Accomplishment (성취) 입니다.
셀리그만은 PERMA 모델을 통해 쾌락을 넘어선 지속 가능한 웰빙의 핵심이 의미, 관계, 그리고 성장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의 통찰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의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인간 존재의 핵심이 ‘쾌락 추구’가 아니라 ‘의미를 향한 의지’임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묻는 존재임을 증명했고, 삶의 의미는 일(work), 사랑(love), 그리고 고통(suffering)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쾌락을 삶의 목적이 아닌 결과로 보았으며, 진정한 행복은 의미를 향한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용적 접근으로 자기계발 분야의 고전인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은 삶의 목적을 다루는 실용적인 지침서입니다. 그는 개인의 성장, 인간관계, 사명 의식 같은 주제를 통해 목적 있는 삶이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리더십 분야의 멘토인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은 『Start With Why(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를 통해 ‘왜(Why)’라는 질문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리더십, 조직, 삶의 동기를 ‘무엇을(What)’, ‘어떻게(How)’, 그리고 ‘왜(Why)’라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는 ‘왜’를 중심에 둘 때 비로소 우리가 방향과 동기를 잃지 않고 의미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이는 존재의 이유를 묻는 삶의 태도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학문적, 실용적 논의 외에도 ‘Verywell Mind’, ‘Psychology Today’, ‘The School of Life’와 같은 대중 심리 콘텐츠 플랫폼들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채널들을 통해 우리는 소유, 경험, 마음챙김, 관계, 기여 같은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현대 사회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다양한 접근이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흐름을 종합하며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반복해서 선택하는 길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가리키는 공통점을 따라가다 보니, 삶의 의미를 찾는 여섯 가지 대표적인 방법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재물과 성공
경제적 안정과 눈에 보이는 성취는 오늘날 가장 익숙한 의미의 근거입니다. “이만큼 이뤘다”는 말 안에 존재의 가치를 담으려 합니다.
2. 쾌락과 경험
멋진 음식, 여행, 엔터테인먼트 같은 즐거운 자극은 일상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3. 관계 맺음
가족, 친구, 공동체 속에서 서로 기대고 사랑을 주고받는 유대는 삶을 지탱하는 따뜻한 힘이 됩니다.
4. 개인의 성장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더 건강한 삶을 추구하며, 내면을 깊게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합니다.
5. 기여와 섬김
나를 넘어 다른 사람을 돕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헌신할 때 큰 만족과 가치를 느낍니다.
6. 마음챙김과 현재에의 집중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합니다. 명상, 몰입, 슬로우 라이프는 내면의 평화를 찾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 방법들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삶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 질문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중요한 탐구입니다.
이렇게 재물, 쾌락, 인간관계, 자기 성장, 사회적 기여, 마음챙김-이런 노력들은 우리에게 행복과 충족감,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약속합니다.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런 결과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이 결국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하고 있는 걸까요?
전도서의 저자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우리보다 먼저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8)
즉,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소유하고 성취해도, 인간의 갈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반복적으로 우리를 이 현실에 직면하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력과 성취가 일시적이며, 결국은 덧없다는 것을 말이죠.
전도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 이는 단순한 시공간적 표현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지금 이 땅에서 관찰 가능한 현실만을 기준으로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전도서는 이를 “해 아래의 관점”이라 부르며, 그 안에서 반복되는 허무와 한계를 깊이 탐구합니다.
많은 전통적 해석에서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풍요와 지혜의 정점을 경험했지만,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추구가 인간 존재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제 우리는, 앞서 살펴본 여섯 가지 방식-재물과 성공, 쾌락과 경험, 관계, 성장, 기여, 마음챙김-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성경이 그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재정적 안정과 사회적 성취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여겨집니다.
“얼마를 벌고 있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어디까지 승진했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긴 시간을 일에 쏟아붓고, 승진을 위해 경쟁하고, 부를 축적하려 애씁니다. 상당한 재물을 얻거나 목표까지 성공하면 마음의 평안과 안정감이 따라올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오랜 시간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높은 자리에 올랐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도 이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조용한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스쳐갑니다. “정말 이게 다였을까? 이걸 위해 이렇게 살아온 걸까?”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니얼 카너먼과 앵거스 디턴은 2010년 연구에서 연 소득이 약 7만 5천 달러를 넘어서면 감정적 행복이 더 이상 유의미하게 증가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소득이 생활의 질은 향상시킬 수 있지만, 감정적 행복은 일정 수준에서 정체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2023년에는 같은 연구자가 참여한 새로운 연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득이 50만 달러까지도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 관계, 정신적 안정과 같은 요소가 동반되지 않으면 소득만으로는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국가별 GDP 수준과 문화적 요인에 따라 행복의 기준선은 달라질 수 있으며,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양한 국제 조사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여,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로또 당첨과 같은 극적인 행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더 이상 큰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소득이 높아질수록 타인과의 비교,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압박감, 더 큰 책임감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더 큰 불안과 스트레스가 뒤따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OECD 국가들의 높은 경제 수준이 반드시 낮은 우울증이나 자살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통계는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합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5:10)
이 말은 단지 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더 많이, 더 높이’를 향한 끝없는 추구는, 결국 만족이 아니라 결핍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눈앞의 목표를 이루는 순간, 또 다른 목표가 보이고, 그것을 향한 압박이 쉼 없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하고, 수고하고, 그것을 누리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서 2:24)
성공을 목표로 삼는 삶과, 결과에 상관없이 감사함으로 누리는 삶은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경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시선을 선물합니다.
재물과 성공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기쁨, 그분의 뜻 안에서 누리는 수고의 열매는 끝없는 결핍의 순환을 끊고, 현재를 살아갈 힘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즐거움 속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주말이면 맛집을 찾아다니고, 휴가가 다가오면 여행지를 검색합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몰아보며 한 주의 피로를 잠시 잊기도 하죠. 이런 경험들은 분명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덜어주는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이처럼 즐거움과 체험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는 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잘 노는 법”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버킷리스트’, ‘힐링’, ‘소확행’ 같은 말들이 일상 속에 자리 잡은 것도 이런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저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이 즐거움의 한계를 조용히 짚어 줍니다.
“자, 이제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좋은 것이 무엇인지 보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2:1)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이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마음 깊은 곳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고요.
실제로 심리학 연구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은 새로운 즐거움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같은 수준의 만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즐거움에 빠르게 익숙해져, 같은 행복을 유지하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는 심리학적 현상입니다. 처음엔 만족스럽던 일이 금세 평범하게 느껴지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되죠.
전도서는 이러한 반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웃음에 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전도서 2:2)
이 구절은 웃음과 기쁨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 안에서 삶의 근본적인 의미까지 찾으려고 할 때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쾌락은 순간의 쉼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삶의 의미로 삼을 때 한계가 드러납니다. 영혼 깊은 곳의 공허함을 온전히 채워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우리에게 모든 즐거움을 멀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서는 기쁨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너는 기쁜 마음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서 9:7)
삶의 소소한 기쁨들-따뜻한 밥 한 끼, 사랑하는 사람과의 웃음,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는 그 순간-이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선물을 붙잡고 의미를 요구하려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누리라.
행복을 찾으려 애쓰는 그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그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누릴지를 다시 물어보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가족, 친구, 연인, 공동체와의 연결은 삶에 의미와 따뜻함을 더해줍니다.
지치고 힘든 날,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다시 걸어갈 힘이 되기도 하죠.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생존뿐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행복에 있어 타인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하버드대의 85년간의 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우리를 가장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좋은 관계’입니다. 연구 책임자 로버트 월딩거는 “중년기의 관계 만족도가 노년기의 건강과 행복을 가장 잘 예측한다”고 말합니다. 브레네 브라운 역시 “연결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조건보다도 관계의 질과 연결의 깊이에 더 크게 좌우됩니다.
전도서의 저자 역시 관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전도서 4:9–10)
이 말씀을 읽으면, 자연스레 장면 하나가 그려집니다. 넘어진 친구를 조용히 일으켜 주는 따뜻한 손길, 침묵 가운데 함께 있어주는 위로의 존재. 이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 함께 웃고 눈물 흘리는 동행은 분명 귀한 선물입니다.
사실 누군가와 함께할 때, 삶은 더 단단해지고 덜 외롭습니다.
이렇게 강한 관계를 꿈꾸는 우리는 종종 그 속에서도 결핍을 경험합니다. 가깝다고 믿었던 관계가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멀어지기도 하고, 죽음이나 상실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요.
한때 신뢰와 사랑으로 맺어졌던 관계도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멘토로서 그를 왕으로 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도했지만, 사울이 교만해지자 결국 그 관계는 단절되고, 사무엘은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한때 다윗을 총애했지만, 질투와 불안이 쌓이면서 다윗을 죽이려는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한때는 귀하고 소중했던 관계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예는 반복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 헌신한 동역자였고, 1차 선교여행을 함께하며 깊은 사귐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를 데려갈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두 사람은 결국 갈라져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아무리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함께해도, 관계는 언제나 연약함과 오해 속에서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관계의 유익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한계와 아픔 역시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전도서 9:5)
인간의 관계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깊은 유대감이라도 결국은 시간 속에서 흐려지고, 이별이라는 현실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편 39:4, 5b)
삶이 아무리 안정되어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은 너무도 짧고 연약합니다. 우정도, 사랑도, 가족이라는 관계의 테두리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과연 이 관계들만으로, 나는 충분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관계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SNS나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수많은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외로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디지털 관계는 실제 인간의 깊은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외로움과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전히 채우지는 못합니다.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소개된 연구들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 사용은 외로움 및 사회적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타인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수동적으로 관찰하고 자신과 비교하는 행위가 외로움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sity)의 9년간의 연구는 소셜 미디어 사용이 실제 관계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고 분석합니다. 오히려 외로운 사람일수록 소셜 미디어에 더 의존하게 되고, 이는 고립감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한 실험에서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냅챗 사용 시간을 제한한 그룹의 우울감과 외로움이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이는 소셜 미디어 사용 자체가 외로움을 유발하는 인과적 증거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단순한 '연결(connection)'이 아닌, 의미 있는 관계와 진정한 소속감을 필요로 합니다. 깊이 있는 교류가 없는 수많은 디지털 관계는 결국 진정한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 안개처럼 덧없다면, 그 안에서 맺는 관계 역시 결국은 유한함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14)
그렇기에 전도서는 더 깊은 차원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시간의 제한을 넘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관계 -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참된 안정과 영원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계를 가졌지만, 하나님은 그 한계를 넘어서 계시는 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둘 때, 우리의 모든 만남과 이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기계발’은 거의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자기계발은 삶의 질을 높이고, 잠재력을 발견하게 해주는 귀한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자격증을 따고, 운동 루틴을 만들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될 때, 방향을 잃고 피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해”, “이렇게 머물면 안 돼”라는 마음은 종종 동기가 되지만, 때로는 깊은 피로와 불안을 남깁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어제보다 발전하는 삶은 분명 의미 있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끝은 어디일까요?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지혜와 지식의 추구가 인간에게 주어진 수고의 일부이며, 때로는 그것이 삶의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도서 1:13)
그는 끝없는 지혜의 탐구조차도 결국 ‘괴로움’이자 ‘헛된 수고’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더 나은 나를 추구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며 자격증 공부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하기 위해 피트니스 도전에 나섭니다.
그 모습은 성실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달성한 후에도 다시 다음 목표, 다음 과제가 이어집니다. 쉴 틈 없는 성장의 루틴 속에서 사람들은 문득 이렇게 묻곤 합니다.
“이걸 다 이뤘는데도, 왜 아직 불안하지?” “더 나아졌는데, 왜 허전하지?” 이는 단지 감정적인 푸념이 아닙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이를 ‘성취 피로(Achievement fatigue)’ 또는 ‘성장 강박(Growth pressure)’이라 부르며, 지속적인 목표 추구가 오히려 정서적 소진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공을 향한 질주’가 어느 순간부터 삶을 갉아먹는 불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관련 연구들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일수록 완벽주의·자기 비난·무기력감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기계발과 성취를 향한 열정은 분명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없이 이루어질 때는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2)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함께할 때에만 그 수고가 의미를 갖는다는 통찰을 줍니다. 자기계발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피로와 불안이 아닌 평안과 목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이와 같은 끝없는 학습과 성장의 압박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12:12)
전도자의 말은 단순히 공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식과 성취를 통해 삶의 본질적 만족을 얻으려 할 때, 그 시도가 얼마나 덧없고 피곤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장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더 나은 나’만을 위한 것일 때,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결국 공허함 속에 길을 잃게 됩니다.
진짜 변화는,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보다 그 성장의 열매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내 삶을 통해 더 큰 선을 향해 나아갈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나눔’과 ‘기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봉사활동, 자선기부, 사회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많은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라는 확신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 매주 노숙인을 위한 급식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씨가 춥고 몸은 피곤해도, 그날 만난 누군가의 미소 한 번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소득 일부를 기부하며, 더 나은 세상에 동참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돕는 일은 우리에게 기쁨과 충만감을 줍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긴 이 선한 영향력은 과연 영원히 기억될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그 따뜻한 순간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잊힌다면, 그 헌신은 어떤 의미를 남기는 걸까?
기여와 섬김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무리 선한 영향력을 남기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인정이나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결국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처럼 유한한 인간의 시각, 즉 ‘해 아래’의 관점에서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말합니다(전도서 1:3).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이름도, 영향력도, 기억도 흐려지는 것이 인생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가령,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을 돌보며, 정의를 위해 싸웠던 누군가의 삶이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을 보면, 조용한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허무함에 대해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섬김의 크기보다 그 동기와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또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섬김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이웃을 향한 복음의 실천입니다. 즉, 신앙 중심의 섬김은 인간 중심의 기여와는 그 본질부터 다릅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헌신이 결국 ‘헛됨’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말하면서도, 그 허무함을 뛰어넘는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하는 모든 섬김의 의미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성경은 그 방향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브리서 6:10)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작은 친절, 이름 없는 수고, 드러나지 않는 섬김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영원히 기억될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유가 단순히 인간의 칭찬이나 순간적인 만족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기쁨에서 비롯될 때, 우리의 모든 수고는 사라지지 않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기여는 삶의 의미를 찾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해답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연결될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갖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마음챙김(mindfulness)을 통해 삶의 균형과 평화를 찾으려 합니다. 마음챙김은 현재 순간에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 감정, 신체적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심리적 수련법입니다.
1970년대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존 카밧진(Jon Kabat-Zinn) 교수가 개발한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이 그 시초로, 동양의 명상 전통을 서양 의학에 접목한 것입니다. 현재 심리학과 뇌과학 분야에서 마음챙김은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 완화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힘을 통해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날 작은 평화를 선물해 줍니다. 하루의 긴장 속에서 잠시 멈추어 호흡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분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숨이 트인다.”
하지만 과연 이 조용한 평화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는 ‘쉼’은, 과연 삶 전체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마음챙김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평화가 소중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마주합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들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릅니다.(전도서 3:11)
이 구절은 우리가 현재의 순간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무리 차분한 호흡을 반복해도, 불확실한 미래와 언젠가 맞이할 상실 앞에서 우리 마음은 여전히 근본적인 의미의 부재를 느낍니다. 마음챙김은 ‘일시적인 고요함’은 줄 수 있지만, 삶의 방향성까지 제시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쉼과 평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이 말씀은 단지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죄의 짐과 삶의 무게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되는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호흡의 고요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를 안아주는 평안입니다. 성경의 또 다른 구절은 진정한 평안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마음챙김은 유익한 습관일 수 있지만, 그 습관만으로는 존재의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쉼은 잠깐일 수 있지만, 평안은 영원하신 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이 결국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부를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관계를 맺고,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현재에 집중하려 합니다. 이 여섯 가지는 각기 나름의 가치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알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요.
더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허전하고, 더 깊은 관계 속에서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더 나은 나를 만들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우리가 의지한 모든 수단은 결국 유한하고, 피할 수 없는 끝인 죽음과 상실, 허무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전도서의 저자는 이 질문에 누구보다도 깊이 몰입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방식-지혜, 쾌락, 부, 업적-을 경험하고 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13)
삶의 허무를 피하려 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본 그는, 결국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의 마음이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만족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안합니다. 눈앞의 수고와 기쁨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덧없음 속에서도 의미를 붙잡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에서 찾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도서 전체에 걸쳐져 있으며, 이 책의 2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과 중복이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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